이혼하고 처음 맞은 계절은 낯설었다. 아침에 눈을 떠도 누구의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처음엔 그 적막이 서늘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적막이 오히려 평온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찾아왔다.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겪던 미묘한 긴장이, 혼자가 되고 나니 사라졌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경조사는 피해 갈 수 없는 자리였다. 몇 해 전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상조 담당자가 상주 이름을 적어 나가는 순서가 되었다. 내 배우자 칸에 이르러, 나는 잠깐 말을 잃었다. 전처의 이름을 어디에 적어야 할지, 적어도 되는지조차 가늠이 서지 않았다. 담당자가 다음 줄로 넘어가려는 순간, 나는 며느리 이름 칸에 그 사람 이름을 적어달라고 했다. 아이들이 있는 한, 이렇게 해도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그 일을 겪고 나서, 나는 경조사라는 것이 이혼한 사람에게도 여전히 한 자리를 내어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누가 묻는다면 그 사람 건강이 좋지 않아 잠시 들렀다 간다고 하면 그만이었다. 굳이 설명을 길게 늘어놓을 필요는 없었다. 세상은 생각보다 그런 것에 무심했다.
이혼 전에는 사소한 일로도 얼굴을 맞대면 다툼이 되었다. 이혼 후에는 그런 일이 거의 없었다. 어느 한쪽이 자리를 뜨면, 다른 쪽도 더 이상 붙잡지 않았다. 남이 된다는 것은, 생각보다 서로에게 예의를 지키게 만드는 일이었다.
부모님의 묏자리를 정하던 날의 일도 떠오른다. 어머니를 선산에 평장으로 모시던 그 자리에서, 아버지께서 지나가듯 말씀하셨다. “내가 죽으면 너희 엄마 옆이 내 자리가 되겠구나.” 하산하는 길에, 나는 형제들에게 말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 곁에 모신다면, 나는 그 장례식에 가지 않겠다고. 살아생전 두 분이 어떻게 지내셨는지 다들 알고 있었으므로, 누구도 내 말에 반대하지 않았다. 적어도 돌아가신 뒤에는, 두 분이 더는 서로를 마주치지 않게 해드리는 것이 자식으로서 할 수 있는 마지막 배려라고 생각했다.
애들 엄마와도 비슷한 거리가 생겼다. 다만 그 거리가 꼭 차갑지만은 않았다. 아이들 일로 연락할 때면, 가끔 그 사람은 밥은 먹었느냐고 물었다. 나는 대개 괜찮다고 답했지만, 그런 질문이 오가는 것만으로도 완전히 남이 된 것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혼자 산다는 것은,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외로움이나 쓸쓸함보다는, 오히려 누구의 기분도 살피지 않아도 되는 단순함이 있었다. 돈이 없는 것은 여전히 궁색했지만, 그것은 혼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빚 때문이었다. 혼자라는 사실 자체는, 생각보다 견딜 만한 것이었다.
(다음 화, “세상 사람들도 다 이혼한다”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