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가 아니라 은퇴자다 (30화)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고, 통장이 압류되고, 파산 직전까지 가 본 사람에게 “실업자”라는 말은 생각보다 가볍게 다가왔다. 그 겨울, 나는 스스로에게 자꾸 이렇게 되물었다. 백수가 된 게 정말 인생이 꼬인 걸까.

가만 생각해보면 우리는 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 태어날 때 백수였으니 죽을 때도 백수로 돌아가는 거다. 백수라서 힘든 게 아니라, 백수가 안 되려고 발버둥 치는 게 힘든 거였다. 그즈음 나는 이 말을 수없이 되뇌었다. 세월이 인생을 이끄는 대로 물처럼 흘러가면 되는 거 아닐까.

쉰 중반, 나는 그 회사에서 스물다섯 해 가까이 밥벌이를 했다. 그만두고 나니 후련했다. 먹고사는 문제로 스스로를 옭아매지만 않는다면 그걸로 좋았다. 죽기 전까지 일을 해야 한다며 자리 하나 끌어안고 버티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때의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누가 뭐래도 나는 직장을 그만두고 나니 좋았다. 세상은 그걸 명예퇴직이라 불렀지만, 나는 ‘은퇴’라는 말로 바꿔 부르고 싶었다. 한 사람의 은퇴는 다른 사람의 입문 기회가 된다. 내 자리가 비어야 다음 사람이 들어올 수 있는 거였다.

은퇴 후 반년, 실업급여를 받았다. 백만 원이 채 안 되는 돈이었지만, 그 겨울의 나에게는 자유의 선물 같았다. 세상은 그걸 구직급여라고 불렀고, 나는 그걸 자유의 선물로 여겼다. 쉰 중반을 살아오면서 그렇게 자유를 느껴본 세월이 없었다. 다시는 그런 시기가 오지 않을 것 같았지만, 그건 또 두고 봐야 알 일이었다.

실업급여라는 게, 받으려면 자격이 꽤 까다로웠다. 근로 의사와 능력이 있는데도 본인 뜻과 상관없이 실직한 상태여야 했다. 회사가 문을 닫거나 정리해고를 당했어야 했다. 제 발로 그만두고 나오면 주지 않았다. 상사나 동료가 싫어서 때려치우고 나오면 못 받았다. 내가 잘못을 저질러 쫓겨난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재취업 활동을 하는데도 취직이 안 되는 상태라야 했다. 욱하는 마음에 자리를 때려치우고 나오면 그 돈은 못 받는다는 걸, 나는 그 겨울에야 제대로 알았다.

실업급여를 받는 사람에게는 조기재취업수당이라는 것도 있었다. 구직급여 받을 기간의 절반 이상을 남기고 재취업하면, 남은 기간의 절반에 해당하는 돈을 한꺼번에 목돈으로 준다는 제도였다. 담당 직원이 그걸 설명해줄 때, 나는 솔직히 전혀 끌리지 않았다. 나는 조기재취업을 원치 않았다. 재취업이 될까 봐 구직 활동도 일부러 안 되기를 바라며 형식만 갖췄다. 실업급여를 받을 근거자료 정도만 쌓았을 뿐, 진심 어린 구직 활동은 서류상으로만 했다. 더 이상 내 사전에 직장생활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무렵의 나는, 남은 인생은 돈을 벌더라도 내 뜻대로, 내 방식대로 벌겠다고 생각했다. 구체적으로는 주식과 파생매매를 전업으로 해보려는 생각이었다. 퇴직금과 여윳돈 몇천이면 충분할 거라 믿었다. 결과만 놓고 보면 그 선택이 무책임했다고 질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자리에 서보지 않은 사람은, 그 시절의 내가 왜 그런 판단을 했는지 함부로 말할 수 없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세월은 흐르고 여건은 바뀌었다. 지금까지의 인생을 돌아보면 고비마다 2%가 부족했다. 일이 성사되기 직전에 8부 능선에서 무너지는 걸 몇 번이나 반복했다. 내 한계로 인한 실패들이 예비되어 있었다는 걸 받아들이기까지 오래 걸렸다. 그래도 그즈음 나는 결심했다. 남은 날들을 살아가며 어떤 일을 하든 성공과 실패의 눈으로만 보지 않겠다고. 결과를 보면 희비가 엇갈리겠지만, 그 과정만큼은 담담하게 음미하겠다고.

쉰 중후반이면 지천명(知天命), 하늘의 뜻을 안다는 나이다. 명함에 적힌 직함 같은 건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대단해 보이는 직함도 결국 사상누각일뿐임을 겪어보지 않고도 깨닫고 있었다. 몸 건강하고 마음 편하게, 내 의지로 하루하루를 그려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다음 화, “혼자 사는 법을 다시 배운다”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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