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업급여를 받던 반년이 끝나갈 무렵, 나는 어떤 결심을 하게 되었다. 다시 취직을 하지 않겠다는 것. 그 대신 혼자 사는 법을 제대로 배우겠다는 것이었다.
쉰 중반이면 사회생활 할 만큼 했다. 목에 걸린 넥타이를 풀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세상은 평생 현역이어야 한다고 사람을 세뇌하고 현혹시키지만, 나는 그 말에 더 이상 흔들리지 않기로 했다. 인생 1막은 끝났고, 실업급여를 받는 막간이 지나면 2막으로 들어서야 했다. 무대와 분위기는 당연히 바뀌는 거였다. 체력은 예전 같지 않았지만 정신은 오히려 더 단단해진 느낌이었다. 조급증과 허망함이 가끔 밀려들었지만, 지천명의 나이를 넘어서니 그것도 견딜 만했다.
사람들은 나이 들수록 곁에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외로움은 나쁜 것이라는 사회적 통념에 길들여져 있을 뿐이다. 혼자 있는 시간이 얼마나 편안한지 세상의 풍파를 덜 겪은 사람들은 잘 모른다. 돌아보면 스트레스의 99퍼센트는 늘 내 곁에 있던 사람들로부터 왔다. 상사뿐 아니라 부하도, 친구도, 가족도 심지어 자식까지 모두 근심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그즈음 나는 모임을 하나씩 줄여나갔다. 직장 다닐 때 이어졌던 인연들도 정리했다. 친구를 만나야 할 일이 있으면 공식적인 자리, 정해진 시간 동안만 얼굴을 비추고 바로 돌아왔다. 2차, 뒤풀이, 주말 모임까지 끌려다니면 결과는 늘 비슷했다. 누구는 할부금을 다 갚았는지도 모를 차를 끌고 와 자랑을 늘어놓았고, 나는 그 자랑과 나에 대한 은근한 핀잔을 다 받아주고 집에 돌아와 속이 쓰린 밤을 보내야 했다. 그런 자리를 줄이고 나니 마음 상할 일도 함께 줄었다.
아이들에게는 한번 이런 말을 흘려본 적이 있다. 혼자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결혼이 꼭 행복으로 가는 길만은 아니라고. 농담 반 진담 반이었지만, 아이들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건 내가 지고 있던 짐의 무게를 애들은 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걔들 어깨에 더 얹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앞선, 조금은 지나친 말이었다. 부모가 다투는 모습을 보며 자란 아이들에게, 결혼이든 혼자든 그건 그들 몫으로 남겨둬야 할 선택이었다. 그때는 그 구분이 흐릿했다.
국민연금도 다시 들여다봤다. 정상적인 수급 연령보다 5년 일찍 받으면 1년에 6퍼센트씩 차감하여 총 30퍼센트가 깎인다고 했다. 남들은 되도록 늦게 받으려고 했지만, 나는 지금 형편이 그렇게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조금 깎인 금액이라도 지금 받는 게 나에게는 적기였다. 한 달에 몇 십만 원으로도 살아갈 수 있는 내공은 이미 쌓여 있었다.
먹고, 싸고, 자는 세 가지를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동안이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 세 가지 중 하나라도 내 힘으로 할 수 없게 되는 날이 오면, 그때는 미련갖지 않고 하늘의 뜻에 맡기겠다고 마음먹었다. 억지로 붙잡지도, 억지로 두려워하지도 않기로 했다.
혼자가 된다는 건 버려지는 게 아니라, 비로소 처음 세상에 나올 때의 나로 돌아가는 일이었다. 그 겨울, 나는 그렇게 혼자 사는 법을 다시 배우고 있었다.
(다음 화, “폴리텍대학 교실에 다시 앉다”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