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가장 깊고 캄캄했던 시절, 나는 반야심경을 외우기 시작했다. 독실한 신자도 아니었다. 명산대첩 사찰에 들를 때면 부처님 앞에 지폐 한 두 장 놓고 소원 하나 비는 정도의 평범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겨울,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다.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처음엔 뜻도 모르고 그냥 소리로 외웠다. 유튜브에서 노래 가사처럼 편곡된 반야심경을 찾아 따라 부르기도 했다. 산스크리트어 원문으로 낭송하는 영상도 찾아 들었다. 음색이 묘하게 마음을 가라앉혀 줬다. 그렇게 수백 번을 되뇌이다 보니 어느 순간 270자 전문을 외우게 됐고, 한자로도 쓸 수 있게 됐다.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들이 (현실 같기도 하고 환상 같기도 한)공과 다르지 않고, (현실 같기도 하고 환상 같기도 한)공이 곧 그것들과 다르지 않다는 말.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되풀이해서 외우다 보니, 어느 밤엔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고통도, 그걸 느끼는 ‘나’라는 존재도 본래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면, 이 고통도 영원히 나를 붙잡아 둘 수는 없을 거라는 생각. 논리로 이해한 건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 같다.
괴로움이 혈류를 타고 머리끝까지 차오를 때마다, 나는 소리 내어 그 문구를 외웠다.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당신이 가진 천수천안,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으로 중생의 소원을 들어준다고 했다. 믿어서가 아니었다. 그 순간 내게 필요한 건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마음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는 무언가였다.
그 무렵,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찾아올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반야심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외웠다. 한 글자씩 되뇌는 동안 숨이 가라앉았고, 외우고 나면 조금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어떤 인생이 좋은 인생이고 어떤 인생이 나쁜 인생인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나는 그저 남들과 다른 길을 걷고 있을 뿐이라고 되뇌었다. 그 생각을 끝까지 따라가지 않기로 한 건, 솔직히 말하면 아이들 때문이었다. 나만 생각하면 포기가 쉬웠을 텐데, 이이들을 생각하면 버텨야 했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이 두려운 게 아니라 삶이 버거운 거라는 걸, 그즈음 알았다. 죽음은 내가 서두르지 않아도 언젠가 찾아올 테니, 그때까지는 버텨보자고 마음먹었다. 반야심경을 외우는 밤이 늘어갈수록, 나는 조금씩 다시 숨 쉬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다음 화, “영화 속에서 나를 보다”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