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번호를 누르지 못한 밤 (18화)

내가 시험에 들었으니 내가 감당해야 한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몫이었다. 가장 짧게 잡아도, 딸 둘 아들 하나가 다 자랄 때까지는 버텨내야 했다. 달콤하게 속삭이는 유혹에 흔들릴 때마다, 나는 그 다짐을 몇 번이고 되새겼다. 깨끗하게 끝내는 것이 차라리 존엄을 지키는 길이라는 생각이 치고 올라올 때마다, 혼자였다면 그 생각에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자식이 있다는 것은, 내가 넘어지면 같이 쓰러질 사람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 무렵 나는 체질에 맞지도 않는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맛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저렴한 막걸리 한 병이면 한 끼가 해결되었다. 안주는 없어도 되었다. 소금 한 자밤이면 충분했다. 맨정신으로는 밥 한술도 넘어가지 않았다. 술로 뱃속을 데운 뒤에야 겨우 숟가락을 들 수 있었다.

술에 취해 잠드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불을 끄고 편히 잠드는 순간, 내가 스스로에게 나태해지는 것이 아닐까 두려웠다. 그래서 불을 켠 채로, 정신이 흐릿해질 때까지 버티다가 쓰러지듯 잠들었다. 알코올에 아예 중독되었으면 오히려 나았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적어도 그러면, 멀쩡한 정신으로 그 밤들을 견디지 않아도 되었을 테니까.

몇 번인가, 위기상담전화에 전화를 걸어볼까 생각했다. 딱히 도움을 구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누군가 내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사실만으로도, 잠시나마 버틸 힘이 될 것 같았다. 전화번호를 검색해 찾아두었고, 실제로 몇 차례나 통화 버튼 코앞까지 손가락을 가져갔다.

그러나 끝내 누르지 못했다. 마지막 숫자 하나를 남겨두고, 매번 망설이다가 전화를 거두었다. 어쩌면 그 전화는, 내가 정말로 끝까지 몰렸을 때를 위해 남겨두고 싶은 마지막 보루였는지도 모른다. 그 번호를 누르는 순간, 내가 얼마나 먼 곳까지 와버렸는지를 스스로 인정해야 할 것 같았다. 그게 두려웠다.

사람은 동물이다. 동물은 함부로 죽지 않는다. 그 말을 되뇌며 버틴 밤들이 쌓여갔다.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그저 술 한 병, 라면 한 봉지, 망설이다 거둔 전화기 하나가 그 밤들을 넘기게 해주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 중에도, 혹시 마지막 번호 하나를 남겨두고 머뭇거리는 손가락이 있다면, 그 손가락을 나무라지 않기를 바란다. 누르지 못했다는 것은 약함이 아니다. 아직 뭔가를 붙잡고 있다는 뜻이다.

(다음 화, “이혼은 불행이 아니었다”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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