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나는 영화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젊었을 때 봤던 영화들을 다시 찾아서 보니, 같은 장면도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행복을 찾아서”를 다시 봤다. 실존 인물인 크리스 가드너가 재산을 의료장비에 쏟아부었다가 쪽박을 차고, 아내와 헤어지고, 어린 아들과 함께 거리로 내몰리는 이야기였다. 그는 무급 인턴으로 버티다 끝내 정규직이 되고 인생을 역전시킨다. 20명 중 1명만 정규직이 되는 구조였다는 걸 알고 나니, 예전처럼 순수하게 감동만 느낄 수는 없었다. 그 1명의 해피엔딩 뒤에는 19명의 다른 결말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 영화가 말하는 한 가지는 틀리지 않았다. 행복은 누가 대신 가져다주는 게 아니라, 내가 역경을 헤쳐가는 과정 속에서 스스로 구하는 것이라는 사실. 나라의 독립선언서도 ‘행복’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보장한다고 했다. 그 구분이 그제야 이해가 됐다.
“레미제라블”의 장발장도 다시 떠올렸다. 빵 하나를 훔친 죄로 수년, 탈옥을 거듭하다 끝내 19년을 감옥에서 보낸 사람. 전과자라는 낙인을 짊어지고도 신분을 바꾸고 다시 일어서서 사업을 벌이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의를 끝까지 실천했다. 지금의 내 고통을 그의 19년과 견주어 보면, 솔직히 어른의 투정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는 결국 ‘용서’였다. 자기 자신을 포함해서.
그리고 “쇼생크 탈출”. 아내와 그 정부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평생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던 주인공이, 수십 년의 침묵과 준비 끝에 감옥이라는 족쇄에서 벗어나는 이야기였다. 폭풍우가 치는 밤, 모두가 경계를 풀었을 때를 기다려 탈출을 감행하는 장면. 30대에 이 영화를 봤을 때는 그저 관객의 눈으로 박수를 쳤다. 쉰 중후반이 되어 다시 보니, 나는 그 주인공의 자리에서 영화를 보고 있었다. 감방 안의 친구에게 남긴 그 말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희망은 좋은 거예요. 아마 가장 좋은 것일 거예요. 그리고 좋은 건 절대 사라지지 않아요.”
잠 못드는 밤들을 보내며, 나는 여러 번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은 생각에 붙들였지만, 그럴때마다 이 영화들 속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들도 자기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던져졌고, 그래도 끝까지 버텨서 자기 몫의 희망이라는 결말에 다다랐다. 극단적인 선택은 결국 그 결말을 내가 직접 쓸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는 일이었다. 어떤 인생이 해피엔딩(happy ending)이 될지, 어떤 인생이 새드엔딩(sad ending)이 될지는 아무도 미리 알 수 없다. 다만 끝까지 가봐야 아는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영화 속 사람들의 자리를 빌려 내 처지를 견뎌내고 있었다.
(다음 화, “다시 씨를 뿌리다”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