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산명시명령, 그 낯선 통지서
어느 날 우편함에 낯선 봉투 하나가 꽂혀 있었다. “재산명시명령.” 법원에서 보낸 그 통지서를 받아 든 순간, 손이 떨렸다. 사극에서 보던 죄인 심문 장면이 머릿속을 스쳤다. 내가 무슨 죄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러나 막상 알아보니, 그것은 변명의 기회였다. 받을 돈을 받지 못한 채권자가 “이 사람이 정말 돈이 없어서 못 갚는 것인지, 돈이 있으면서 안 갚는 것인지” 확인해 달라고 법원에 요청한 것이었다. 법원은 채권자의 편도, 채무자의 편도 아니었다. 그저 중간에서 사실을 확인하는 자리일 뿐이었다. 내 재산 목록을 솔직하게 적어내고, 판사 앞에서 그 목록에 거짓이 없다는 것을 선서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절차였다.
생각보다 많았던 사람들
지정된 날, 법원에 출석했다. 기껏해야 열몇 명 정도 모일 것이라 예상했는데, 그 자리에는 백 명도 넘는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며칠 뒤에 또 비슷한 숫자가 출석한다는 말을 듣고 더욱 놀랐다. 빚에 시달리는 것이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날 처음으로 실감했다.
이삼십 대부터 나와 비슷한 나이대까지, 칠십 대로 보이는 분도 섞여 있었다. 어린아이를 업고 온 젊은 부부도 있었다. 무언가 사업을 시작했다가 어려워진 모양이었다. 내 눈이 닿지 않던 세상의 이면에, 빚의 무게를 지고 사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았다는 사실이, 죽어가던 내 삶의 의지를 조금씩 일깨우는 것 같았다.
재산목록, 숨길 것도 꾸밀 것도 없었다
재산목록을 적어내는 양식은 생각보다 복잡해 보였지만, 내용은 단순했다. 동산, 부동산, 예금, 채권, 급여소득 등 항목별로 체크하고, 해당하는 내역을 적으면 되었다. 나는 숨길 것도, 과장할 것도 없었다. 통장 잔고는 거의 바닥이었고, 부동산은 없었다. 오히려 마이너스 통장 내역을 적어 내는 것이 민망할 정도였다. 거짓이 드러나면 위증죄로 처벌받는다는 안내가 있었지만, 나에게는 해당할 일이 없었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의 마음은, 오히려 담담했다.
법원 시설은 생각보다 쾌적했다. 대기하며 자판기 커피 한 잔을 뽑아 마셨다. 긴장한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저 법원이 안내한 대로, 직원이 일러주는 순서를 따르면 되는 일이었다.
지금, 이 글을 쓰며 덧붙이는 말
10년이 지난 지금, 채무자를 둘러싼 제도는 그때보다 조금씩 나아졌다. 지금은 채무자가 추심 과정에서 과도한 연락을 받지 않도록 하는 장치도 생겼고, 채무조정을 요청할 수 있는 권리도 더 분명해졌다고 들었다. 그 시절의 나는 몰랐던 보호 장치들이다. 혹시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비슷한 통지서를 받아 들고 있다면, 겁부터 먹지 않기를 바란다. 법원에 가는 길은, 생각보다 두려운 길이 아니다.
(다음 화, “빚은 연좌되지 않는다”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