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스스로 자란다 (22화)

세상은 이혼한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이 어딘가 결핍될 것이라고 쉽게 단정한다. 나도 한때는 그 통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아이들에게 못할 짐을 지워준 것은 아닐까, 그 죄책감이 오래도록 나를 괴롭혔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부모가 불화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과, 부모가 이혼한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아이들의 기억에는 이미 그 불화가 새겨져 있었다. 이혼을 했다고 그 기억이 더 깊어지는 것도 아니었고, 이혼을 하지 않았다고 그 기억이 지워지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다투는 모습을 계속 보여주느니, 관계를 정리하고 각자의 자리에서 아이들을 대하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완전한 단절이라는 것은, 이 디지털 시대에는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느 새벽, 나는 아이의 메신저 가입 알림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휴대폰 하나만 있으면, 부모와 자식 사이의 연결은 끊어지지 않는다. 내가 곁에 있지 않아도,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어떤 식으로든 지켜볼 수 있었다는 사실이 그제야 위로가 되었다.

부모 품 안에서 자라야만 좋은 환경이라는 생각도 내려놓기로 했다. 어떤 환경에서 자라든, 제대로 클 아이는 제대로 큰다. 양쪽 부모 밑에서 자랐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어른이 되는 것도 아니고, 한 부모 밑에서 자랐다고 해서 반드시 부족한 어른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자라는 환경이 인생을 완전히 담보하지는 않는다. 다만 영향을 줄 뿐이다.

부모로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모든 어려움을 대신 막아주는 울타리가 아니라, 아이가 스스로 헤쳐나갈 힘을 믿어주는 일이었다. 아이들이 살아갈 날에 어떤 일을 겪을지, 부모가 전부 예측하고 대비해 줄 수는 없다. 언젠가는 엄마도 가고 아빠도 간다. 그 이후를 살아가는 것은 결국 아이들 자신의 몫이다.

딸 둘, 아들 하나는 각자의 속도로 자라고 있었다. 누구는 말이 없어졌고, 누구는 오히려 더 씩씩해졌고, 누구는 표정을 읽기 어려워졌다.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그 시절을 통과하고 있었을 뿐, 어느 쪽도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혼한 부모 밑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다만 남들보다 조금 빨리 철이 드는 것뿐이다. 정해진 행복한 인생도 없고, 정해진 불행한 인생도 없다. 모두가 각자 다른 길을 가는 것뿐이다. 그 길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더 불행한 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다음 화, “혼자 짊어지는 빚”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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