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업은 어쩌면 가장 먼저 예고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명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었지만, 결국은 조직이 나를 내보낸 것이었다. 빚은 그다음으로 왔다. 그리고 이혼은, 그 둘이 만들어낸 필연 같은 결과였다.
시기의 문제였을 뿐, 이혼은 이미 정해진 수순이었다. 아파트를 처분하기로 한 순간부터 모든 절차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부부 싸움 끝에 오고 간 거친 말들이 발화점이 되었지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그동안 쌓여온 침묵과 실망이 임계점을 넘었을 뿐이다.
법적인 절차에는 시간이 걸렸다. 미성년 자녀를 둔 부부에게 주어지는 숙려 기간이 있었다. 그 몇 개월 동안, 우리는 한 지붕 아래서 서로를 모른 척하며 지냈다. 미성년 자녀에 대한 양육 관련 교육도 함께 받으러 다녀야 했다. 양육권은 애들 엄마에게 돌아갔지만, 공동으로 법정후견인이 되기로 합의했다.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조금이라도 더 빨리 대처할 수 있는 쪽이 나이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재산분할이라는 것도 우리에게는 의미 없는 절차였다. 나눌 재산 자체가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파생매매로 이미 모든 것을 날려버린 뒤였다. 양육비는 돈이 생기면 당연히 보내겠다는 말로 형식적인 합의를 마쳤다. 지킬 수 있을지 그때는 자신이 없었다.
이혼을 하고 난 뒤에도 같은 집에서 지내야 하는 며칠이 있었다. 그 며칠 동안의 공기는 이상했다. 더 이상 부부가 아니면서도 한 공간에 있어야 했던 그 시간. 누구에게 잘못이 있는지 따지는 일은 이미 의미를 잃었지만, 서로에 대한 배신감만은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아이들은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이 무엇보다 무거웠다.
25년을 쌓아온 부부의 인연이 그렇게 끊어졌다. 결혼으로 맺어졌던 처가 쪽 사람들과의 인연도, 전기가 끊기듯 한순간에 사라졌다. 양쪽 부모가 멀쩡히 살아 있는데도, 아이들은 한 부모 가정의 자녀가 되어 있었다.
이사를 하던 날, 나는 혼자 따로 나왔다. 짐을 정리하면서 원칙을 하나 세웠다. 돈으로 다시 살 수 있는 물건이라면 미련 없이 버리자고. 손수레로 네 대 분량의 책을 고물상에 넘겼다. 그 책들은 내가 살아오며 쌓아온 정신의 기록 같은 것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저 무게로만 느껴졌다. 학교에서 배운 지식으로는 인생을 살아낼 수 없다는 것을, 나는 가진 재산 다 날리고 나서야 깨우쳤다.
나 홀로 원룸 생활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애들 엄마와는 처음엔 가끔 문자나 전화를 주고받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연락도 뜸해졌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어디선가 들었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그제야 실감했다.
실업, 빚, 이혼. 세 개의 왕관이라 불러야 할지, 세 개의 가시라 불러야 할지. 나는 그 세 가지를 동시에 짊어진 채, 쉰을 갓 넘긴 나이에 혼자가 되어 있었다. 그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는, 겪어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다음 화, “원룸, 창이 없는 방, 하늘 볼 일 없는 방”으로 이어집니다)